신공항, 문 대통령에게 명분을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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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조폭 두목 형배는 라이벌 판호가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을 뺏자는 ‘대부’ 익현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먹으로야 내가 백번 이기지. 그런데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건달 세계에도 룰이란 게 있는데….” 조폭끼리 싸울 때도 명분이 필요한데, 하물며 정해진 국가정책을 뒤집는 일은 오죽할까.
가덕도 신공항의 깃발을 다시 곧추세운 부산 여권이 한 사람, 문재인 대통령의 입을 애타게 쳐다보고 있다. “김해공항 확장으로는 내 공약인 동남권 관문공항을 만들 수 없다는 게 확인됐다”, 그의 입에서 이 한 마디만 나와 준다면 신공항 ‘10년 전쟁’도 마침내 ‘게임 끝’이라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끝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뒤로 하고, 당면한 문제는 문 대통령이 그럴려는 낌새를 전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청와대를 출입하는 기자가 지금껏 이 문제에 대해 들은 참모들의 발언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물론 이런 말들이 문 대통령의 생각을 100% 반영했다고 볼 순 없지만, 적어도 문 대통령이 가덕도 신공항과 거리를 두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부산의 백년대계를 위한 24시간 공항의 필요성, 김해공항의 구조적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과거 가덕도 신공항을 명확하게 지지한 문 대통령이 입을 굳게 다문 이유는 자명하다.
문 대통령이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순간, 부산과 대구·경북(TK)를 견원지간으로 만든 10년 갈등의 문이 다시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구 지역 한 신문의 1면 제목이 ‘부산,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TK ’2016 밀양 악몽‘ 재연 막아야’였다. 아마 문 대통령이 가덕도의 손을 드는 순간 ‘TK 포기선언’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최근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내년 총선 승리를 통해 국정 동력을 유지하는 게 최우선인 문 대통령이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문 대통령의 가덕도 신공항 결단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확실한 명분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최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대구공항 통합이전 사업을 확정한 후 가덕도신공항을 추진하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이성적으로 따지고 보면 TK가 가덕도 신공항을 반대할 이유는 많지 않다. 밀양을 그토록 밀었던 이유인 K2 공군기지의 이전은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추진으로 정리가 됐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대구 지역 한 언론인은 양 지역 신공항 갈등에 대해 “감정 싸움”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번 기회에 오거돈 부산시장과 이 지사 등 영남권 광역단체장들이 양 지역의 염원하는 제대로 된 신공항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방안, 나아가 영남권 전체의 항공 수요를 배가시킬 비전에 대해 터놓고 얘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신공항 논의가 지역 간 대립으로 무산된 슬픈 역사를 반복하는 대신 싸우던 두 지역이 ‘윈윈’하는 상생 구도로 전개돼 ‘지방에 또 무슨 공항이냐’는 수도권의 낡은 통념에 ‘한방’ 날릴 수 있다면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문 대통령의 ‘결단’을 이끌 가장 확실한 명분이 될 것임도 불문가지다. j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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